2014년 10월 28일 화요일

셰익스피어 가상 인물설

영국 이코노미스트 10대 음모론 中 하나

셰익스피어 가상인물설
셰익스피어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은 18세기부터 제기되어 왔으며. 셰익스피어 작품의 실제 작가에 대해선 크리스토퍼 말로, 엘리자베스 1세, 프란시스 베이컨 등 수많은 인물들이 지목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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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유채 초상화는 이른바 "챈도스 초상화"로, "제1 이절판(the First Folio)" 에 실린 오른쪽 초상화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이 인물이 셰익스피어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Good friend for Jesus sake forbeare to dig the dust enclosed here. Blessed be the man that spares these stones / And cursed be he that moves my bones.
"여기 덮인 흙을 파헤치지 마시오 / 이 돌을 건드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 이 뼈를 옮기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리라"


1. 셰익스피어의 생애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는 귀족집안의 자제도 아니고, 대학교육을 받지도 못했지만 그런 사람들을 능가하는 심오한  이해력을 바탕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 문장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에대한 상세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고 말할수 있는 수준이다.

심지어 생년 월일조차 명확하지 않다. 포털사이트에는 1564년 4월 26일 태어나 1616년 4월 23일 숨진것으로 표시돼있지만,  실제로1564년 4월 26일은 그가 유아세례를 받은 날일뿐이다. 이에 근거해 대략 5~60세로 사망나이를 추정하고있다.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기역시 밝혀진 바가 없으며더욱이, 사생활은 그야말로 신비롭다.

그는 1564년 영국의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이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느 정도 부를 축적했던 상인 아버지 '존' 의 덕택으로 유복한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고향의 그래머스쿨(대학진학을 위해 가는 중등학교)까지 교육받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583년에 자신보다 8살 연상이었던 앤 헤서웨이(Anne Hathaway)와 어린나이에  결혼했으며, 이듬해에 딸을, 1585년에 쌍둥이를 얻어 세례식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약 7년간 셰익스피어가 어디서 뭘 했는지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592년 동시대의 극작가 로버트 그린이 보낸 서한에서 셰익스피어를 언급한 기록이 있어 꽤 잘나가는 극작가 였을거라 짐작하고있다.
(참고로 로버트 그린이 보낸 서한은 "학식 낮은 촌뜨기가 벼락출세를 하더니 누구 못지않게 잘할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라고 비난했다.)
이를 단서로 전문가들은 극작가로서의 활동시기를 1590~1610년까지로 추정한다. 이시기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여전히 알수가 없다.

말년에는 저명인사가 된것으로 전해지며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낸다.

그러나 은퇴한 이유 사인 등은 여전히 미스테리이며, 확증은 없지만 그의 묘비에 쓰인글 "여기 덮인 흙을 파헤치지 마시오 / 이 돌을 건드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 이 뼈를 옮기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리라" 은 셰익스피어가 직접 쓴 글로 알려져있다.

한편 셰익스피어는 1616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37개의 희곡과 154편의 시를 남겼는데, 시의 경우 생전에 발표한 두 편 외에는 모두 사후에 책으로 공개됐다.





2. 셰익스피어 음모론의 근거.

- 엄청난 유명인사지만 그의 삶에대한 종적이 거의 전무하다.

- 37개의 희곡과 154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 흔한 친필 원고조차도 단 한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 셰익스피어는 " 대리석의 왕후의 황금 기념비도 이 힘있는 시보다 오래가지 못한다" 라는 말을 남길정도로 자신의 시에대한 애착이 대단했는데 유언에서조차 자신의 작품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 시골 출신으로 대학 교육도 못 받은 그의 환경과 작품의 완성도가 너무나 차이가난다.
  그의 작품에는 방대한 지식과 엄청난 어휘가 사용되었고, 더군다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어휘가 풍부한 것이 아니라 당시 왕실이나 귀족들의 생활상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한다.

참고로 그가 유년기를 보냈던 고향에서는 별달리 읽을만한 서적도 없었으며, 중학교에 해당하는 그래머 스 쿨(grammar school)만 다니고, 제대로 된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그의 부모, 자식, 아내(아내는 악처로 유명했다고 한다), 온 가족이 문맹이였다.


3. 의문제기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했으며 대표적으로는

영국의 위대한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그의 진위여부를 밝혀내야 한다고 이야기한 바가 있으며,  영국내의 유명인사 287명이 공식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흑인운동가 말콤 X는 영국의 군주 제임스1세 셰익스피어라고 주장했으며, 1984년에 찰튼 오그번 주니어는 "셰익스피어가 실존 인물이었던 건 확실하지만 그가 썼다고 말해지는 작품들은 한 사람에 의해 집필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 뒤에서 내용을 더하고 빼고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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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음모론 담은 책)



4. 그렇다면 누가 썼을까? ; 가장 유력한 인물들


1) 엘리자베스 1세의 사생아 : 에드워드 드 비어

이 설은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에서도 다뤄진적이 있을정도로 유명하였으며,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의 얼굴과 셰익스피어 초상화의 얼굴이 비슷하다는데에서 기인되었다고 한다.

 미국 극작가 폴 스트라이츠가 저서 ‘옥스퍼드:엘리자베스 1세의 아들’에서 셰익스피어가 엘리자베스 1세의 사생아라고 주장했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스트라이츠가 이 책에서 “평생 독신으로 지내 영국과 결혼했다는 엘리자베스 1세가 사생아를 몇명 낳았으며 1548년 비밀리에 낳은 첫 사생아가 셰익스피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셰익스피어는 16대 백작 존 드 비어 부부에게 맡겨 에드워드 드 비어로 양육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있었기에 ' 햄릿' 등의 작품에 그의 비극적인 내용을 반영했다고 설명한다.


2) 프란시스 베이컨

당대 최고의 철학자인 베이컨이 암호를 통해 작가가 자신임을 알 수 있도록 그의 이름을 작품 속에서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

그는 대 학자였으며 방대한 지식을 소유했지만 작가로 알려지길 꺼려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은 길거리 약장수나 매춘과 비슷한 정도로 여겨지고 있었다고 함)
셰익스피어 희곡들은 법률과 프랑스 궁정이 자주 언급되는데 프랜시스 베이컨은 프랑스를 방문한 동생 앤서니에게서 프랑스의 자세한 사정이 적혀 있는 편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에서 대법관이었으며 어머니는 수상의 친척이었고 프랜시스는 영문학 사상 손꼽히는 시들을 다수 남긴 시인이었다.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암호, 논리학 등 다방면에 걸쳐 지식이 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가 남긴 희곡들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정보들을 가장 잘 다룰수 있을거였으며, 그가 법무장관에 취임하던 해 1611년, 셰익스피어가 활동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당대에 베이컨이 암호에 익숙했음을 근거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조상에 새겨진 알파벳들을 해독 가능하게 정렬시켜 보면 베이컨의 이름을 이루고 있는 글자들 'FRANCIS BACON'이 모두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3) 옥스퍼드 가문의 17대 백작 에드워드 드 비어 ( 첫번째 설과 약간 다름 )
그는 귀족 출신으로, 상당한 교육을 받았으며 높은 지식수준으로 글을 썼지만 시대적인 상황으로 제 3자의 필명을 빌려써야 했다는 설로 필명 (셰익스피어)가 옥스퍼드의 가문 문장 ; 부러진 창을 휘두르는 사자의 모습
즉 shake(흔들다) 와 spear(창) 이 합쳐져서 창을 휘두르는 사자의 형상을 필명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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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가문의 문장과 셰익스피어) 

또한 햄릿의 경우 이상할 정도로 옥스퍼드 백작의 인생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한다.
가장 가능성이 많다고여겨지는 주장이다.
4) 크리스토퍼 말로

여왕의 스파이로 비밀 첩보 활동을 한 바 있는 말로가 자신이 주장한 무신론이 화근이 되어 체포와 사형을 모면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기에,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필명을 바꾸어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는 것.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신문 기자 캘빈 호프만은 '셰익스피어라는 사람의 피살 문제'라는 책에서, 크리스토퍼 말로가 그의 후원자였던 토마스 월징엄 경의 사주자들의 손에 살해된 것이 아니라, 무신론자로 처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월징엄 경이 말로가 살해당한 것으로 위장한 후 유럽으로 안전하게 도피시켰으며, 후일 말로는 비밀리에 귀국하여 월징엄 경의 집에 은신하며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으로 극작을 발표했고 말한다."


5. 지식인들 공동집필

그 당시에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의 대학 지식인들 중 몰래 연극에 참여한 이들이 적지않게 있었다고 한다.
이들중 몇몇이 사회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셰익스피어라는 필명뒤에 숨어서 글을 집필했다는 주장.

당시에는 공동창작이 워낙 빈번한 일이였기에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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