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5일 목요일

우체부 A의 수첩

인류는 끝장나고 말았다. 

별로 슬프진 않다. 내 삶이 크게 달라진 건 없으니까. 
나같은 녀석과는 아무 상관이 없던 ‘위대한 시대’였다, 
하늘을 새카맣게 채웠던 비행기와 우주선들. 효율적이고 완벽하게 돌아가던 세상의 질서. 

이제는 없다. 
아무 것도. 
신선한 물 한 모금에 칼부림이 나는 세상이 되었다.
인류는 생존에서 출발해 종교와 이념을 지나 경제이데올로기의 시대로 향했다. 
끝없이 계속되던 성장! 성장! 성장!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이제는 생존만이 전부다. 처음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 누구였더라, 예전의 어떤 과학자가 말한 ‘돌과 몽둥이’의 시대가 된 것이다!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난 예전이 그립지 않다. 조금 편했고, 지천에 먹거리가 쌓여있었지만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요즘 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무리가 있는데, 내 앞에서 그딴 얘기를 하면 주먹을 먹일테다. 
‘인간성을 되찾자’니 ‘만물의 영장으로의 회귀’라니 뭐니. 죄다 헛소리다. 
지금의 나? 
나는 우체부다. 새로운 시대의 지배자.
많은(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건네주는 통조림에 눈물을 흘린다. 솔직해진 것이다. 
남녀노소, 재물의 유무를 막론하고 둥그렇게 모여앉아 맛대가리없는 통조림을 퍼먹으며 내 입에서 흘러내리는 보드카를 훔쳐본다. 
물론 진짜 보드카다. 여기저기에 널린 저질 알콜과 차원이 다른 보드카, 마시고 취해버릴 수 있는 안전한 진짜 술.
신이여! 세상은 비로소 평등해졌습니다. 
예전에 알던 이들이 거의 죽어버린 건 조금 아쉽다. 지금 만난다면 한껏 비웃어줄텐데 말이지.
세상이 망해 버린 뒤로(최근에 거기에 '변화'라는 이름을 붙이던데 윗대가리들은 언제나 웃기는 짓만 한다. 변화라니, 때깔은 좋다만 '멸망'이 맞지 않을까?) 도시는 그 기능을 멈춰 버렸다. 오히려 도시가 제일 위험하다.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들어서 난장판이 된지 오래다. 
비바람에 삭아가는 고층건물들이 기분나쁘기도 하고. 나도 배달일정에서 도시는 가끔씩 잊어먹곤 한다. 워낙 바빠서 말이지. 
여기저기에 작은 공동체가 생겨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어차피 헛일이다. 
오늘 갔던 마을이 다음에 가면 없을 것이고, 또 다른 마을이 생겨났다 사라질 것이다. 
나의 지도는 거의 빈자리가 없을 만큼 빨간 동그라미로 가득 찼다. 
빨간 동그라미가 뭐냐고? 뻔하잖아. 끝장나버린 놈들이지. 

그런 의미에서 난 참 운이 좋다. 담당구역이 사라져도 교육원에 보고 안하는 동료들을 뒀으니까. 
옆 구역 담당자 콧수염 씨는 너무나 올바르신 분이라 변동사항을 꼬박꼬박 보고한단다. ‘사명감’에 불타는 우체부라. 
인류의 희망! 자그마한 불꽃을 전달하는 프로메테우스!
참으로 성자 나셨다. 그치? 그 친구는 자기 정비사가 비행 때마다 나사를 조금씩 풀고 있는걸아는지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피곤한 녀석들은 여전히 피곤하다. 도대체 배움을 모르는 한심한 족속들. 
우리는 어제만 해도 짭짤하게 건졌다. 물과 공기, 식량만 아홉 박스. 셋이서 나눠도 모자람이 없다.

마을 세 개가 실제로 사라졌고 두 개쯤은 깜빡한 것 같은데. 
두 마을 인간들이 운이 좋아 다음 배달 때까지 살아있다면 난 구세주가 되는 것이고 다 죽었다면 또 그 것대로 괜찮다. 
어찌되었든 손해 보는 건 아니다.
잘만 풀린다면 올해 안에 신분증을 구할 것 같다. 이 지긋지긋한 황색지대에서 벗어나는 거다.
황색지대(黃色地帶). 지금 내가 사는 저주받은 땅을 일컫는 말이다. 선택받지 못한 인간들이 힘겹게 삶을 연장하는 땅. 

하루하루 구역질나는 놈들과 엮이는 일상을 참는다. 24시간 들여 마셔야하는 이 텁텁한 공기도 참는다. 
희뿌연 안개도, 괴상한 동물들의 울음소리도, 전부 참아야한다. 

어차피 인간은 끝났다. 오늘 죽냐 내일 죽냐의 차이 뿐이다. 난 최대한 즐기다 죽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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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XX월 X일.
원인불명의 이유로 XX구역에서 추락한 비행기에서 발견된 승무원의 수첩.
원 소지자는 사망했으며 시신은 다른 신원 미상의 사체와 함께 회수됨
-나머지 한 구는 찾을 수 없음. 
근무 일지에는 세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시신은 둘밖에 발견하지 못함. 
나머지 한 명의 생존 가능성은 없을 것으로 사료됨.

훼손된 수첩에서 식별 가능한 부분을 정리하여 보고함.
일선에서 근무하는 우체부에 대한 정신감정의 필요성을 제기함.
그들은 스스로에게 과도하게 권한을 부여하고 있으며 상당히 위험한 사태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임.

또한 우체부들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 중에서도 근거없는 소문을 믿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음. 
-황색지대, 청색지대, 신분증, 청정지역 따위의 단어사용을 금지시킬 것.
사회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소를 제거하도록 까마귀 파견을 제안함.

                                                                       교육 담당 XXX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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